매경 글로벌 픽(Pick)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매일경제 글로벌경제부 김유신 기자입니다.
최근 글로벌 AI 업계를 이끄는 주요 최고경영자(CEO)들이 이례적으로 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AI 발전에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규제 칼자루를 쥐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AI 안정성 우려가 터무니없는 음모"라며 맞받아쳤습니다.
기술을 만드는 기업은 멈춰야 한다고 경고하는데, 감독권이 있는 정부는 더 빨리 달려야 한다고 등 떠미는 묘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속도가 가팔라졌다"…다리아 아모데이가 첫 포문 열어
속도 조절론의 포문은 AI 모델 ‘클로드’의 개발사 앤트로픽의 다리오 아모데이 CEO가 열었습니다. 아모데이는 최근 CBS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AI 기술 발전을 "1, 2, 4, 8, 16, 32"로 이어지는 기하급수적 곡선에 비유했습니다. 현재 기술 발전의 궤적이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가팔라지는 초입에 도달했다는 분석입니다. 그는 “이는 발전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명백한 경고 신호”라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경쟁사 수장들도 이례적으로 아모데이의 의견에 동조했습니다.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는 엑스(X)를 통해 "다리오의 말처럼 프론티어 AI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며 "기업 내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독립 평가자를 두겠다는 구상은 훌륭하며, 오픈AI 역시 같은 조치를 취하겠다"고 화답했습니다. 올트먼은 앞선 포춘과의 인터뷰에서도 "인류가 절멸할 위험이 10%에 달한다는 점을 감수하면서까지 무모하게 기술을 추진할 수는 없다"고 토로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와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까지 가세해 "다리오의 진단이 옳다"며 지지를 보냈습니다. 현업 최전선에서 파괴적 잠재력을 가장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는 개발사들이 AI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이 상실될 수 있다는 우려를 보인 것입니다.
아모데이의 3단계 로드맵
아모데이는 구체적인 해법으로 3단계 로드맵을 제시했습니다. 기업 내부에 제3자 평가기관을 둬 상시 위험을 점검하고, 민주주의 진영 국가들이 모여 AI 개발 가이드라인을 세운 뒤, 최종적으로는 권위주의 국가들과도 검증 체계를 마련하자는 것입니다. 다만 기술 유출 방지와 최첨단 반도체 수출 통제를 통해 대중국 기술 격차는 엄격히 유지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습니다.
"AI 멈추면 중국만 웃는다"…트럼프와 젠슨 황의 반격
반면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루스소셜을 통해 "AI와 데이터센터를 겨냥한 역겨운 음모"라며 속도 조절론을 일축했습니다. 속도를 늦췄을 때 이득을 챙길 유일한 나라는 중국뿐이라는 논리였습니다. "AI에서 이기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우리는 경쟁국들을 앞서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경고도 덧붙였습니다.
상징적인 장면도 연출됐습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LA 기술 컨퍼런스 무대 위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전화를 받아 스피커폰으로 통화 내용을 현장에 공개한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통화에서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지나치게 과장됐다고 거듭 강조했고, 젠슨 황 CEO 역시 “AI 개발 속도를 늦추는 것은 명백한 실수”라며 보조를 맞췄습니다.
실제로 속도 조절론이 부각되자마자 전력망, 데이터센터, 반도체 등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던 AI 인프라 시장은 투자 지연 우려로 즉각 출렁거렸습니다. 젠슨 황 입장에서도 하드웨어 수요 위축을 방어해야 필요성이 있었던 셈입니다.
기술적 불안 vs 정치적 셈법…멈출 수 없는 패권 전쟁
현 상황이 이처럼 모순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AI 속도 조절론에 대한 찬반 입장이 다른 층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AI 수장들의 문제의식이 기술의 임계점 도달에 따른 '통제 불능 리스크'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 노선은 철저히 정치·경제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저는 해석됩니다. 당장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대규모 인프라 투자와 경제 성장 동력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전선은 워싱턴 정가로도 확장되고 있습니다. 공화당이 산업 부흥과 데이터센터 확충을 전면에 내세우는 반면, 민주당은 전력망 과부하와 용수 부족 문제를 부각하며 개발 속도 제어를 선거 쟁점으로 끌어올렸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명확한 대립각을 세워 지지층을 결집하고, '중국 위협론'을 자극해 '마가(MAGA)' 표심을 다잡으려는 포석입니다.
위험에 대한 시각은 다르지만...패권 유지 의지는 양측 모두 동일
결국 AI의 파괴적 위험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간극이 존재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교집합은 있습니다. AI 패권 경쟁에서의 낙오는 곧 글로벌 패권의 상실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모데이는 AI에 대한 인간의 통제를 잃을 수 있다는 유려를 나타내면서도 "중국과의 격차는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펼쳤습니다. 그 방안으로 최첨단 AI칩에 대한 수출 통제와 기술 탈취 제어 등을 제시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AI 기술 개발에 더 박차를 가해야 한다며 내세우는 논리도 중국의 굴기입니다.
이런 점을 미뤄볼 때 미·중 간의 패권 경쟁의 결과가 판가름 나기 전까지는 AI 위험에 대한 경고음이 아무리 커지더라도 AI 개발을 위한 페달에서 발을 떼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